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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민의 사람수첩] 1990년대 이영미 플레이가 그리운 이유
1990년대 일본여자프로골프(JLPGA) 투어에서 8승을 장식한 이영미. 사진은 2009년 국내 시니어 투어 출전 당시 모습. (사진=KLPGA 제공)

[레저신문=오상민기자] 1990년대 한국 여자 골프 주역이 한자리에 모였다. 1992년부터 3년간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 상금왕에 오른 이오순(57), 일본여자프로골프(JLPGA) 투어 통산 8승(메이저 1승)을 장식한 이영미(56), 국내 투어 3승의 이선희(45) 등 11명의 선수가 국내 시니어 투어 세계화에 의기투합했다. 지난 3월 12일 서울 강남의 한 호텔에서 열린 FX렌트(회장 조정식) 시니어 골프단 출범식 풍경이다.

이 중 눈에 띄는 선수는 KLPGA 부회장을 겸하고 있는 이영미다. 지난해 KLPGA 챔피언스(시니어) 투어 시즌 마지막 대회(15차전)에서 우승한 이영미는 2016년 3월 KLPGA 부회장으로 선출돼 선수 겸 단체장으로서 종횡무진 활약을 이어가고 있다. 국내외 투어에서 전부 우승을 경험한 선수가 KLPGA 단체장에 오른 건 고(故) 구옥희에 이어 두 번째다.

이영미는 2008년부터 KLPGA 시니어 투어에 출전해 9차례나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KLPGA 부회장으로 선출된 뒤에는 집행부라도 선수로서 대회에 출전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상대적으로 침체된 챔피언스 투어 활성화를 위해서다.

지난 3월 12일 열린 FX렌트 시니어 골프단 출범식. 앞줄 오른쪽 끝이 이영미. (사진=넥스트스포츠 제공)

이영미는 단체장으로서 제2의 골프 인생을 활짝 열었다. 20년 이상 국내외 투어를 통해 얻은 경험과 인맥이 그의 성공 비결이었다. 올 시즌 KLPGA 챔피언스 투어는 12개 대회 총상금 13억원 규모로 치러진다. 10년 전인 2009년(5개 대회 총상금 2억원)과 비교하면 상대적 빈곤 속에서도 괄목할 성장을 이뤘다.

특히 이영미는 올 시즌 KLPGA 챔피언스 투어 사상 첫 인터내셔널 대회를 성사시켜 주목받고 있다. 5월 29일부터 이틀간 강원도 횡성군 알프스대영컨트리클럽에서 열리는 FX렌트 인비테이셔널(총상금 2억원)로 JLPGA 투어 통산 7승의 니시다 지에코(53ㆍ일본), 통산 5승의 쩡슈펑(51ㆍ대만) 등 1990년대 아시아 골프계 주역들을 초청해 국내 레전드들과의 명승부를 기대하고 있다.

이처럼 선수 겸 단체장으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는 이영미지만 그가 1990년대 일본열도를 뒤흔든 레전드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듯하다.

지난 시즌 KLPGA 챔피언스 투어 15차전에서 우승한 이영미. (사진=KLPGA 제공)

1985년 KLPGA 투어에 데뷔한 이영미는 1988년부터 JLPGA 투어에서 뛰었다. 1992년에는 기분 레이디스 클래식에서 JLPGA 투어 첫 우승을 장식하며 상금순위 4위에 올랐고, 1998년에는 도쓰자동차 레이디스 프로골프 토너먼트 우승에 이어 시즌 최종전이자 왕중왕전 성격의 JLPGA 메이지유업컵(지금의 투어 챔피언십 리코컵)에서도 정상에 올랐다. 핫토리 미치코(51), 히고 가오리(50), 다카스 아이코(67ㆍ이상 일본) 등 당대 최고 선수들을 모조리 따돌린 우승이어서 의미가 남다르다.

그의 통산 8승은 전부 1990년대에 나왔다. 당시는 한국선수가 많지 않아서 동료의 우승이 곧 나의 우승처럼 기뻤다. 지금은 사라진지 오래지만 우승한 선수는 일주일간 한국선수들에게 밥을 사는 무언의 약속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리운 풍경도 많았다. 매니지먼트가 없던 시절이었기에 한국 선수들의 우정은 더 돈독했다. 자차가 없는 선수를 위해 대회장까지 서로 태워주는 일은 기본이었고, 대회 종료 후에는 도쿄에 살던 이영미의 집에 모여 떡볶이 같은 매운 한국 음식을 해먹으며 웃음꽃을 피우기도 했다.

이영미는 한국선수들 사이에서 살림꾼이자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했다. 1990년대 후반에는 JLPGA 투어 진출 한국 선수들이 크게 늘면서 일본어가 서툰 후배들을 위해 통역원을 자처하고 나섰다. 오전 조로서 경기를 일찍 마친 날에도 늦게까지 대회장에 남아 통역을 해준 일도 수차례 있을 정도다.

지난 시즌 KLPGA 챔피언스 투어 15차전에서 우승한 이영미. (사진=KLPGA 제공)

그는 집(도쿄)에서 멀지 않은 사이타마현이나 지바현에서 대회가 열리면 도시락을 싸가 한국선수들과 나눠 먹곤 했다. 찬합엔 정성으로 말아낸 김밥과 각종 전을 담았고, 보온병엔 뽀얀 곰탕 국물을 넣어 대회장 갤러리 하우스에 앉아 함께 먹었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풍경이지만 이영미가 레귤러 투어에서 활약한 200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흔한 풍경이었다.

이영미는 구옥희가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진출로 자리를 비운 1990년대 초반 사실상 한국인 에이스 역할을 했다. 전성기를 훌쩍 넘긴 2000년대에는 어린 후배들이 일본에 정착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강자만이 살아남는 냉철한 승부의 세계 속에서도 인간미가 철철 넘쳤던 그였지만 경기에만 임하면 독사 같은 눈빛과 칼날처럼 예리한 아이언샷으로 일본 톱플레이어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는 풍경이기에 애잔한 추억으로 남았다.

결코 녹록하지 않은 투어 환경 속에서 구옥희의 도전정신과 굳은 신념을 어린 후배들에게 뿌리 깊게 심어준 그였다. 그 신념은 패배를 모르는 유전자로 재탄생해 전 세계인이 부러워하는 골프강국의 밑거름이 됐다. 우리가 소홀이 했던 이영미의 1990년대는 그렇게 뜨겁고 화려한 이야기보따리를 품고 있다. 흐릿해진 기억 속에서 무게감을 잃어가는 1990년대 이영미의 이야기보따리가 점점 더 애잔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오상민 기자  ohsm31@yahoo.co.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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