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기획 인터뷰
[오상민의 사람수첩] 20대 끝자락서 만난 정재은, “계란 한 판을 선물로 줘요?”
올 시즌 일본여자프로골프(JLPGA) 투어 31개 대회를 모두 마친 정재은. 20대 끝자락에서 새로운 목표를 향해 다시 뛴다. (사진=오상민 기자)

벌써 4년이 흘렀다. 지난 4년은 그의 골프인생 전환점이었다. 유소연, 최혜용(이상 28ㆍ메디힐)과 함께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 여자골프 단체전 금메달 주역으로서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에 데뷔한 그였다. 그런 그가 2015년 일본 무대에 첫발을 내디뎠다. 치열했던 지난 4년간의 생존경쟁은 그의 플레이에 풍미가 되어 녹아들었다. 20대 끝자락에서 또 다른 도전을 준비하는 정재은(29)이다.

그가 일본 진출을 결심한 건 2014년 드림투어(2부)를 경험하면서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어지면서 골프를 그만둘 생각까지 했던 때다. 하지만 마음을 다잡고 골프에만 전념하니 새로운 세상이 보였다. 그는 그 해 드림투어에서 우승 한 차례와 준우승 5차례를 차지하며 상금왕을 거머쥐었지만 국내 투어에 머물지 않았다. “우물 안 개구리가 되고 싶진 않았다.” 그가 일본으로 발길을 돌린 이유다.

비록 첫 우승은 실패했지만 상금순위 30위 이내라는 최소한의 목표는 달성했다. 상금순위 상위 25위 이내 선수만 출전할 수 있는 시즌 최종전 리코컵도 처녀 출전했다. (사진=오상민 기자)

막연한 상상 속에서 기대감을 부풀렸던 일본 무대였다. 그곳에서 꽃피울 새로운 골프인생을 상상하니 이전에 없던 뿌듯함이 밀려왔다. 하지만 일본여자프로골프(JLPGA) 투어 데뷔와 함께 시작된 건 고단한 호텔생활이었다. 일본엔 한적한 시골마을이라도 호텔이 많다. 대부분 작고 시설이 부실해서 몸이 재산인 프로골퍼로선 한숨이 앞설 수도 있다.

정재은은 일본에서 집 없이 대회장 인근 호텔을 전전하며 약 9개월을 버틴다. 대회가 없는 주는 한국으로 돌아와 휴식을 취했다. 하지만 연중 38개 대회 중 31개 대회에 출전한 정재은이 지난 4년 동안 경험한 호텔은 베이스캠프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듯하다.

매 대회 교통수단은 대부분 비행기와 렌터카다. 대회장에서 가장 가까운 공항까지 날아가 렌터카로 공항↔호텔↔대회장을 오가는 일을 반복했다. 필드에서 모든 것을 쏟아낸 뒤 태산 같은 짐을 차 안에 꾹꾹 눌러 싣고 또 다른 목적지를 향해 운전대를 잡는 순간은 파도 같은 피로감과 상실감이 밀려온다. 일본 진출 초기엔 아버지 정홍렬(61) 씨가 함께했지만 지금은 완전히 홀로섰다. 1년에 한 두 차례 가족의 일본 방문이 기다려지는 건 운전대라도 맡긴 뒤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을 수 있어서 일지도 모른다.

정재은은 장타력보다 정확한 쇼트게임이 장기다. 실수를 해도 리커버리 능력이 뛰어난 만큼 효율적인 플레이를 한다. (사진=오상민 기자)

고단한 타지 생활에서 위로가 되는 건 투어를 함께 뛰는 한국선수들이다. 특히 배희경(26), 윤채영(31ㆍ한화큐셀) 등 한국선수들과 잘 어울린다. 시간만 맞으면 식사를 함께하면서 맥주 한 잔을 곁들이기도 한다. 일본 음식은 대부분 입맛에 맞아서 메뉴를 고르는 데 오래 고민하지 않는다. 사시미(생선회), 스시(초밥)는 물론이고 한국인 다수가 꺼려하는 낫토(대두를 발효시킨 일본의 전통식품)도 즐겨 먹는다.

정재은은 올 시즌 31개 대회에 출전했는데 우승 없이 톱10에 6차례 진입하며 상금순위 24위(4445만367엔)를 차지했다. 시즌 초반에는 T포인트 레이디스 골프 토너먼트 공동 4위, 야마하 레이디스 오픈 가쓰라기 공동 3위, 후지 산케이 레이디스 클래식 공동 7위에 들며 선전했지만 좋은 분위기를 오래 이어가진 못했다. 특히 어스ㆍ몬다민컵부터 3개 대회 연속 컷 탈락이 컸다. 다행인 건 하반기 들어 샷 감을 회복했고, 메이저 대회 일본여자프로골프선수권에선 준우승하며 시즌 중 부진을 만회했다.

내년 시즌은 드라이브샷 정확도가 관건이 될 전망이다. 올 겨울 전지훈련의 부담스러운 과제이기도 하다. (사진=오상민 기자)

덕분에 시즌 초 목표했던 상금순위 30위 이내와 투어 챔피언십 리코컵 출전도 달성했다. 지난 4년간 개인 최고 성적이기도 하다. 사실 일본 진출 첫해만 해도 그의 목표는 지금처럼 소박하지 않았다. 남들처럼 1차 목표를 우승으로 잡았다. 하지만 당연했던 목표들이 하나씩 멀어지면서 이상보다 현실에 충실하게 됐다. 실현 가능한 목표를 우선 달성하는 게 시급했던 거다.

데뷔 첫해였던 2015년은 가능성을 확인한 시즌이었다. 주쿄TVㆍ브리지스톤 레이디스 오픈 준우승, 악사 레이디스 골프 토너먼트 in 미야자키와 호켄노마도구치 레이디스에선 5위에 이름을 올리며 우승 가능성을 엿봤다. 문제는 2년간 국내 투어와의 병행이었다. 일본 대회 출전 기회가 줄어든 만큼 좋은 흐름도 이어갈 수 없었다. 4년간의 일본 투어에서 가장 아쉬운 점을 뽑으라면 아마도 이 시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시즌 최종전 투어 챔피언십 리코컵 출전을 앞둔 정재은이 인터뷰를 마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오상민 기자)

정재은의 나이도 어느덧 서른을 앞두고 있다. 수년 전만 해도 은퇴를 진지하게 고민할 나이였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계란 한 판의 의미조차 알지 못했다. 서른이란 나이에 크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눈치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신지애(30ㆍ쓰리본드), 안선주(31ㆍ모스버거), 황아름(31) 등 서른을 넘긴 선배 선수들이 올 시즌 절정의 기량을 발휘했고, 이지희(39), 전미정(36) 등 여전히 건재한 베테랑 선수들도 많다.

물론 체력적 부담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얼마 전부터 체력안배를 위해 무리한 연습은 피하고 휴식시간은 늘렸다. “어린 선수들에 비해 체력은 떨어질 수 있지만 기술은 밀리지 않는다.” 20대 끝자락에서도 변치 않은 자신감이 그를 처절한 승부의 세계에 다시 서게 한다. 조금 늦더라도 좋다. 그의 스윙엔 이미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숙성시킨 깊은 맛이 느껴진다. 그 농익어 가는 플레이를 오랫동안 볼 수 있다면 기쁜 마음으로 기다릴 수 있을 것 같다.

오상민 기자  ohsm31@yahoo.co.jp

<저작권자 © 레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상민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