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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민의 현장] 서른 살 신지애 플레이의 마성
신지애(왼쪽)와 캐디 사이토 유지. 지난해부터 호흡을 맞추고 있다. 사이토는 신지애의 눈만 봐도 무엇을 원하지는 알 수 있단다. (사진=오상민 기자)

농익은 플레이였다. 국내 골프팬들은 해외에서 뛰는 30대 한국 여자선수들의 플레이를 가까이에서 볼 수 없다는 점에 아쉬워해야 할 것이다. 신지애(30ㆍ쓰리본드)의 소름 돋는 역전 우승을 보면서 20대 초중반 선수들의 플레이에선 느낄 수 없던 풍미에 사로잡혔다. 그것은 단맛도 짠맛도 쓴맛도 아니다. 장시간 우려낸 사골국물의 구수함과 적정 시간 숙성시켜 깊어진 장맛이라고나 할까.

신지애는 골프라는 게임을 통해 다양한 맛을 이끌어내는 능력을 지녔다. 일본여자프로골프(JLPGA) 투어 시즌 중 평균 드라이브샷 비거리 50위권에 불과한 그다. 호쾌한 장타력 없이도 보는 사람의 심장을 쥐었다 놓을 만큼 스릴 있는 게임을 한다. 20대 초중반 선수들의 플레이가 날것이라면 신지애의 플레이엔 오랜 시간 공을 들여 가공한 흔적이 보인다.

JLPGA 투어 드라이브샷 평균 비거리 50위권에 불과한 신지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장을 쥐었다 놓을 만큼 스릴 있는 플레이를 선보인다. (사진=오상민 기자)

특히 볼을 목표 지점에 정확하게 세우는 능력은 그야말로 일품이다. 신지애는 유틸리티클럽(페어웨이우드와 아이언의 특징을 복합한 이형 클럽)의 승부사다. 그가 사용하는 유틸리티클럽은 로프트 20도와 23도인데 당일 컨디션이나 코스ㆍ바람에 따라 둘 중 하나를 선택한다. 두 개의 유틸리티클럽을 들고 목표지점을 바라보며 고민하다 하나를 선택하는 장면은 다른 선수들이 그린 주변에서 웨지를 선택하는 모습과 미묘하게 닮았다.

신지애의 캐디 사이토 유지(44ㆍ일본)의 말을 빌리자면 두 개의 유틸리티클럽을 웨지 사용하듯이 한다. 유틸리티클럽으로 쳐서 그린 위 목표 지점에 정확하게 세우는 선수는 캐디 경력 23년 동안 신지애가 처음이다.

20대의 신지애 플레이와 30대 신지애 플레이의 차이점은 멘탈이다. 경기 흐름을 읽고 조율하는 능력이 월등히 좋아졌다. (사진=오상민 기자)

25일 끝난 시즌 최종전이자 4번째 메이저 대회 투어 챔피언십 리코컵(총상금 1억엔ㆍ우승상금 2500만엔)에서도 유틸리티클럽의 진수를 보여줬다. 16번홀(파3ㆍ171야드)에서 23도 유틸리티클럽으로 티샷해 핀 1m 이내에 붙이며 완벽한 버디 기회를 만들어낸 것이다. 사실상 신지애를 우승으로 이끈 명장면이었다.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회심의 미소를 교환하는 신지애와 사이토의 모습은 전율마저 느끼게 한다.

골프가 무엇이기에, 아니 신지애의 플레이가 무엇이기에 사람의 마음을 이리도 쥐락펴락하는 걸까. 20대의 신지애 플레이에선 느낄 수 없던 마성이다. 그의 플레이는 가까이에서 지켜볼수록 풍미를 더한다. 신지애 플레이를 매 대회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본 사이토는 2년간의 콤비를 통해 신지애의 광팬이 됐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사이토의 캐디 인생 종착점은 신지애다. 신지애에게 불필요한 존재가 된다면 캐디 생활을 그만하겠다는 뜻이다.

시상식 전 고개 숙인 배희경은 위로하는 신지애. 배희경은 이번 대회에서 신지애와 연장 승부 끝에 준우승했다. (사진=오상민 기자)

신지애는 경기 흐름을 읽고 조율하는 능력도 탁월하다. 20대의 신지애 플레이와 30대 신지애 플레이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이 능력이 올 시즌 메이저 대회 3승 포함 4승을 달성하며 메르세데스랭킹(최우수선수) 타이틀을 거머쥘 수 있었던 원동력이다.

그는 플레이 중 기회와 위기가 공존한다고 믿는다. 기회를 살리지 못하면 반드시 위기가 찾아온다는 것이다. 존(ZONEㆍ극도의 집중력을 발휘하는 상태)에 들었을 땐 좋은 흐름을 길게 이어가기 위해 가급적 실수를 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20대의 신지애 플레이에선 존을 길게 이어가지 못했다. 거짓말 같지만 지금은 존에 들어가면 가급적 오랫동안 머물 수 있는 방법을 터득했다.

리코컵 우승으로 올 시즌 메이저 대회 3승 포함 4승을 달성하며 메르세데스랭킹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사진=오상민 기자)

신지애 예찬이 아니다. 서른이 넘어 농익은 플레이를 구사하는 선수가 어디 신지애뿐인가. 올 시즌 JLPGA 투어는 30대 이상 선수들이 흐름을 주도했다. 연간 38개 대회 중 14승이 30대 이상 선수들에게서 나왔으니 결코 과장된 말은 아니다. 안선주(31ㆍ모스버거)는 5승을 달성하며 개인 통산 4번째 상금여왕에 올랐고, 황아름(31)은 9년간의 침묵을 깨고 3승을 장식하며 서른한 살 전성시대를 활짝 열었다.

지금껏 은퇴를 고려할 나이로 여겨졌던 서른이기에 이들을 향한 눈빛에 존경심이 녹아든다. 시대가 바뀌었다. 골프 플레이의 또 다른 맛을 알아가는 나이에 은퇴란 말은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다.

올 시즌 JLPGA 투어를 주름잡은 30대 한국 여자선수들의 풍미 있는 플레이는 목표의식을 잃고 방황하는 20대 중후반 선수들에게 충분한 자극제가 됐을 것이다. 자신의 골프 플레이에 녹아든 맛을 음미해보라. 당신의 골프엔 어떤 맛이 느껴지는가.

오상민 기자  ohsm31@yahoo.co.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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