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어가 능숙한 안선주. 대회장에선 늘 대회를 주도한다. (사진=오상민 기자)

역사가 움직였다. 안선주(31ㆍ모스버거)가 일본여자프로골프(JLPGA) 투어에서 4년 만의 개인 통산 4번째 상금여왕에 오르며 한국은 물론 일본 여자 골프사마저 뒤흔들었다. 일본 여자 프로골프 51년 역사에서 총 21명의 상금여왕이 탄생했지만 4차례 이상 상금여왕을 달성한 선수는 전설적 골프영웅 히구치 히사코(73ㆍ일본ㆍ11회)와 투 아이유(64ㆍ대만ㆍ7회), 후도 유리(42ㆍ일본ㆍ6회), 그리고 안선주뿐이다.

2010년 일본 무대에 데뷔한 안선주는 22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4승을 달성하며 한국인 첫 상금여왕 자리에 앉았다. 고(故) 구옥희, 이지희(39), 전미정(36) 등이 도전했지만 오르지 못했던 자리였기에 역사적 의미를 더했다. 특히 구옥희는 1985년 시즌 3승을 비롯해 통산 23승을 기록하며 20년 가까이 JLPGA 투어를 호령했지만 단 한 차례도 상금여왕 타이틀을 획득하지 못했다.

티오프 시간에 맞춰 연습그린에서 퍼팅 연습을 하는 안선주. (사진=오상민 기자)

안선주는 이듬해인 2011년에도 4승을 챙기며 2년 연속 상금여왕 자리를 꿰찼고, 2014년엔 무려 5승을 쓸어 담으며 통산 세 번째 상금여왕 영예를 안았다. 당시 그의 나이는 27살에 불과했다.

이후 안선주는 매년 1승 이상을 달성하며 꾸준히 활약했지만 잦은 부상과 슬럼프 속에서 힘든 시기를 보내야 했다. 그러는 사이 이보미(30ㆍ노부타 그룹)라는 특급 스타가 등장하면서 골프팬과 언론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어느덧 그의 나이도 서른을 훌쩍 넘겼고, 이젠 베테랑이 되어 어린 후배들과의 처절한 생존 경쟁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올 시즌 안선주의 플레이엔 이전에 없던 풍미가 더해졌다. 막강한 비거리를 앞세운 닥공 골프에서 치밀한 코스매니지먼트를 바탕으로 한 전략적 플레이어로 변신한 것이다. 상반기에만 4승을 달성하며 독주하던 스즈키 아이(24ㆍ일본), 한국ㆍ미국에 이어 3국 상금여왕을 노리던 신지애(30ㆍ쓰리본드)의 거센 추격을 뿌리치고 거머쥔 상금여왕이어서 성취감도 남다른 한해다.

티샷 후 타구를 바라보는 안선주. 올 시즌은 비거리보다 코스매니지먼트에 전념하고 있다. (사진=오상민 기자)

무엇보다 서른을 훌쩍 넘긴 나이다. 통산 6차례의 상금여왕에 오른 후도는 서른 살이 되던 해 쇠퇴기를 맞았고, 이후 단 한 차례도 상금여왕에 오르지 못했다. 2015년과 2016년 2년 연속 상금여왕을 달성한 이보미(30ㆍ노부타 그룹)도 서른이 된 올 시즌 최악의 부진을 피하지 못했다. 여자 선수로서 서른이란 나이는 체력 저하는 물론 결혼과 출산이라는 갈림길에서 상실감마저 밀려드는 시기다. 남자들의 서른과는 분명 다른 의미를 지닌다.

그런 면에서 안선주는 행복한 30대를 맞았다. 남편 김성호(33)씨, 아버지 안병길(62)씨의 따뜻한 응원과 새 매니지먼트사 조인트원(대표이사 사장 요시다 하야토)의 든든한 후원 속에서 운동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온갖 부상과 지긋지긋한 슬럼프 속에서도 위대한 기록을 남길 수 있었던 원동력이다.

티샷 전 연습스윙으로 몸을 풀고 있는 안선주. (사진=오상민 기자)

그를 네 번째 상금여왕으로 이끈 또 하나의 원동력은 안정적 투어 시스템이었다. 일본은 선진 투어 시스템으로 정평이 있다. 골프라는 기본에 충실한 대회 운영, 상상을 뛰어넘는 코스 세팅, 선수를 최우선 배려한 시설ㆍ환경, 풍부한 팬서비스 등 어느 것 하나 나무랄 데가 없다, 무궁무진한 잠재력을 지닌 어린 유망주들이 굳이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진출을 꿈꾸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안정적 투어 시스템은 선수 수명 연장으로 이어졌다. 올 시즌 치러진 36개 대회 중 13개 대회 우승컵은 30대 이상 선수들의 몫이었다. 1승은 40대 일본인 오야마 시호가 가져갔다. 특히 1987년생 동갑내기 안선주, 황아름, 아리무라 지에는 약속이라도 한 듯 서른을 훌쩍 넘긴 나이에 제2의 황금기를 열었다. 황아름은 10년 가까운 부진을 깨고 거짓말 같은 재기에 성공했고, 통산 14승의 일본인 에이스 아리무라는 6년 만의 감격의 우승을 달성하며 현지 골프팬들을 환희에 빠트렸다.

올해부터 아이언 계약이 해지된 안선주. 자신에 맞지 아이언을 선택할 수 있게 됐다. (사진=오상민 기자)

지극히 상식적이면서 모두에게 공평한 투어 환경이 뒷받침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슬럼프 속에서도 목표의식을 분명히 할 수 있었고, 나이가 들어도 제 기량을 마음껏 펼칠 수 있다는 믿음도 자리했다. 언제 어디서든 운동에만 전념할 수 있으며, 세계적인 스타플레이어들도 은퇴하기 전 꼭 한 번 뛰어보고 싶어 하는 무대이기에 포기할 수 없었다. 그 안정적 투어 시스템이 잠들어 있던 베테랑 선수들의 투혼을 깨웠다. 그리고 위대한 기록으로 응답했다.

오상민 기자  ohsm31@yahoo.co.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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