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날 한복을 입고 인정전(仁政殿) 조정을 거니는 관람객.

비는 산수풍경을 그리는 붓이다. 장대비로 계곡물을 그리고, 궁궐 낙숫물은 돌에 홈을 파낸다. 창덕궁 후원의 자연은 그렇게 깨어난다.
비 오는 날 창덕궁을 걷고 싶은 이유는 차분하게 깊어진 궁궐의 색다른 모습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비가 오면 줄어드는 발길 덕분에 궁궐의 고즈넉함이 더해지기도 한다. 도심에 자리한 궁궐을 홀로 거닌다면, 상상 이상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창덕궁은 주변 지형과 어우러진 가장 한국적인 궁궐이다. 이 창덕궁에서 정치의 중심이 된 곳은 인정전과 선정전, 희정당이다. 인정문을 통과하면 ‘어진 정치를 펼치다’라는 뜻의 인정전(仁政殿)이 모습을 드러낸다. 중앙에 우뚝 솟은 중층 건물이다. 비 오는 날 인정전 앞 넓은 마당에 깔린 박석은 물을 머금어 세월의 흔적을 드러낸다. 인정전을 향해 일렬로 세운 품계석에 서면 조선 시대 양반이 된 기분이다. 

헌종의 사랑 이야기가 스며든 낙선재 일원은 단청하지 않은 소박한 모습, 경사진 터와 계단에 심은 꽃나무, 돌로 쌓은 단아한 굴뚝이 눈길을 끈다. ‘창덕궁 달빛기행’ 프로그램에 참가하면 낮에 공개되지 않은 낙선재 후원에도 가볼 수 있다. 

비 오는 날, 창덕궁의 매력이 배가되는 후원도 있다. 조선 왕실의 정원인 창덕궁 후원은 중국의 이허위안, 일본의 가쓰라리큐와 함께 아시아 3대 정원으로 꼽힌다. 갈참나무와 때죽나무, 단풍나무, 팥배나무, 소나무, 산벚나무가 일제히 비를 반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도심 온도와 평균 7℃차이가 나기에, 마치 원시림에 들어선 것 기분을 느낄 수 있다. 

후원을 걸어 제일 먼저 닿는 곳은 부용지다. 부용정이 물 위에 반쯤 뜬 채로 있고, 맞은편에 주합루가 연못을 지키듯 서있다. 왕의 휴식처이자 과거를 치른 이곳은 이제 누구나 쉴 수 있는 공간이 됐다. 존덕정 일원도 감탄을 자아낸다. 존덕정에서 옥류천으로 가는 산마루턱을 열심히 걸으면 소요암을 만난다. 후원의 마지막 영역이자, 가장 깊숙한 곳이다. 소요암 아래 너럭바위에 홈을 파서 물길을 돌려 작은 폭포를 만들었는데, 비가 오면 더 운치 있다. 

비가 많이 온 다음 날이면 인왕산 수성동계곡으로 발길을 옮기자. 수성동계곡은 흐르는 물소리가 경복궁까지 들릴 정도로 크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계곡에 오르는 길은 볼거리가 있어 힘들지 않다. 걷다 보면 파스텔 톤 우산에 쓴 시가 눈에 들어온다. 바로 종로구 누상동 9번지, ‘윤동주 하숙집 터’다. 1941년 연희전문학교(연세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윤동주 시인은 소설가 김송의 집에서 하숙했는데, 이곳 수성동계곡 바로 아래다. ‘별 헤는 밤’ ‘자화상’ ‘또 다른 고향’ 등을 이 시기에 썼다. 집 담벼락엔 1970년대 누상동 풍경을 담은 그림이 걸렸다. 현재 하숙집의 원형은 없지만, 계곡을 따라 인왕산에 오르면 윤동주문학관에서 시인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수성동계곡이 있는 서촌은 골목마다 남은 옛 정취와 감각이 돋보이는 갤러리와 카페가 공존한다. 그래서인지 서촌은 단골 데이트 코스이자, 주말 나들이 장소가 됐다. 통의동 골목에 위치한 대림미술관은 서촌의 대표 미술관이다. 특히 비 오는 날 미술관 산책과 카페 ‘미술관옆집’에서 마시는 커피 한잔은 더할 나위 없는 낭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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