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특별자치도는 본섬 외에 가파도, 마라도, 우도, 비양도, 상추자, 하추자도, 횡간도, 추포도 등 모두 8개의 유인도가 있다. 그 가운데 한림읍 협재리 앞바다에 떠있는 비양도는 제주에서도 가장 빼어난 절경으로 손꼽힌다. 

제주 비양도는 생각마저 지워내는 코발트색 바다와 함께 화산활동 기록을 지닌 유일한 섬이라 지질학 가치 또한 크다. 그저 바라만 봐도 아름답고 평화로운 섬, 비양도는 마음 속 깊은 상처를 간직한 주인공 은호(지진희)와 정은(고현정)이 서로의 아픔을 보듬으며 ‘진정한 만남과 이별이란 무엇인가’의 진수를 보여줬던 드라마 ‘봄날’ 촬영지였다. 한라산의 민낯을 보기 위해 수많은 사진가들이 드나든다는 기생화산 비양도. 태양 빛과 푸름이 절정을 이루는 여름 언저리에 제주 명물바람을 타고 천년의 섬을 찾아 길을 나섰다. 

한림항에서 북서쪽 5㎞ 떨어진 비양도는 도항선 비양호가 하루 세 번(오전 9시, 낮 12시, 오후 3시) 뱃길을 오간다. 길손을 태운 배는 정각 12시에 출항하여 15분뒤 압개포구에서 내리면 먼저 이 섬의 역사를 알려주는 두 개의 표지석이 눈에 띄었다. 

고려 목종 5년(1002) 6월, 산이 바다에서 솟아났는데, 네 개의 구멍에서 붉은 물을 닷새 동안 내뿜다 그쳤다. 그 물은 모두 용암이 되었다. 1007년 서산이 바다 가운데서 솟아오르니 태학박사 전공지를 보내어 살피게 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산이 처음 솟아오를 때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고 땅이 천둥처럼 진동하였는데, 7일이 지나서야 비로소 개었다. 산 높이는 1백여 장, 둘레는 40여리나 되었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8, 제주목 -

당시 사람들은 화산활동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갑자기 바다에서 천둥치고 붉은 물(용암)을 토해내며 산이 솟아나는 모습은 가히 천지개벽으로 느꼈을 것이다. 화산재와 함께 유황 연기에 가린 하늘을 향해 용이 승천한다는 믿음은 오래전부터 구전된 토속신앙이었다. 이런 믿음 때문인가. 섬에 대한 첫 인상은 색다르게 다가왔다. 

비양도 속살을 보려면 섬 일주를 하거나 비양봉 정상에 올라야 한다. 다행히 다음 배까지 3시간이란 여유가 있어 선착장에서 왼쪽 길로 들어선다. 마을회관 앞에는 지난 2005년 3월에 종영된 SBS 드라마 ‘봄날’ 촬영지를 기념하는 조형물과 2002년 비양도 탄생 천년을 맞이해 세운 ‘천년기념비’가 있다. 여기를 지나면 바다를 왼쪽에 두고 해안일주 길이 길게 이어진다.  

면적 0.59㎢에 해안선 길이 3.5㎞인 비양도는 전체적으로 동북사면이 가파른 경사를 이루는 타원형이다. 동서 1.02㎞, 남북이 1.13㎞인 섬 한 가운데에는 한라산 기생화산 중 유일하게 두 개의 분화구를 거느린 비양봉(114m)이 있다. 남사면에 큰 분화구(32m)와 서사면의 작은 분화구(32m)에는 소나무가 서식한다. 1995년 8월 제주기념물 제48호로 지정하여 보호하는 비양나무는 국내에서 이곳 분화구에서만 자생하는 희귀종이며, 전체 토질은 화산 쇄선물인 ‘송이’로 구성됐다. 

조선조 고종 13년 서 씨가 처음 들어와 살았다지만, 고려말 해상방어를 위해 망수(望守)를 배치했다는 기록이 있어, 그 이전부터 사람이 살았을 것이라 추측한다. 황돔 농어 옥돔 뱅어돔 등 어족 80여 종과 다양한 해조류가 서식하고, 전복 소라 해삼 오분자기가 특산물이란다. 
용암이 흘러 굳어진 길, 걷는 내내 검거나 혹은 붉은색을 띠고 기암괴석을 보이는 현무암 사열을 받는다. 더욱이 자동차가 없어 걷기에만 몰두할 수 있어 매력 만점이 아닐 수 없다. 구름 위를 거니는 듯 발걸음은 비양도 치안센터를 가볍게 지나 비양봉을 향해 오른쪽 나무계단으로 들어선다. 
한 걸음씩 계단을 오르는 만큼 시야는 더욱 넓어지고, 이내 대숲이 길게 이어진다. 예전, 제주에 딸린 섬에는 화살이나 생활도구를 만들기 위해 곳곳에 대나무를 심었다. 그래서 대섬[竹島]으로 불린 곳이 많다. 비양도도 예외가 아니었다. 제주목사 이형상의 ‘탐라순력도(1702)’ 가운데 ‘비양방록’을 보면 대나무가 많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당시는 오름 저지대에 많았고, 지금은 오름 정상 부근에 집중된 모습이 다르다할까. 

온몸을 서북풍에 맡긴 채 유유자적 오르는 오름 능선. 올해도 어김없이 바람을 노래할 짙푸르고 키가 큰 억새가 해풍에 휘둘리며 시간을 마중한다. 비양도 전망대에서 잠시 숨을 고른 뒤 오르막을 스쳐 오른 정상에는 1958년에 세운 하얀 무인등대가 고독함 속에 우뚝 섰다. 제주의 너른 바다는 물론 수많은 오름을 거느린 한라산과 한림읍과 협재해수욕장 일대가 장엄하게 조망된다. 

섬 이동 설화는 인도네시아와 미크로네시아, 말레이시아에서 폴리네시아까지 남방 해양민족이 발상지로 알려졌는데, 우리의 고대국가인 가야 허 왕후 도래와 신라 석탈해설화, 그리고 이곳 제주도의 영등할망을 모시는 내방신 숭배사상과 삼성신화에서 남방문화 유입을 엿볼 수 있다.
하산과 동시에 섬 일주는 계속 된다. 구멍 숭숭 난 돌담 너머로 푸른 하늘에 피어오른 뭉게구름과 쪽빛 바다, 해녀들의 숨비 소리가 어우러진 천혜의 느린 섬 걷기. 그러나 구름에서 벗어난 초여름 오후 햇볕이 제법 따갑지만, 군데군데 마련된 쉼터에서 다리쉼 하자면 어디선가 시원한 기운이 몰려와 온몸에 스며든다. 흘리는 땀방울만큼 몸과 마음이 개운하고 상쾌함, 바로 이것이 걷는 묘미가 아닐까.  

해안가에는 다양한 모양의 화산석들이 널려 있어 ‘살아있는 화산박물관’임을 확인하며, 코끼리를 닮았다는 ‘코끼리바위’와 자갈밭해변을 지난다. 해변을 장식한 수석거리 끄트머리에 용암가스가 만들어낸 신비한 조각품 ‘호니토’에 발길을 멈춘다. 호니토란 용암 속에 있던가스와 수증기가 밖으로 배출되면서 굴뚝 모양으로 만들어진 화산체로서 제주도에서도 이곳밖에 없단다. 특히 ‘애기 업은 돌’로 알려진 부아석(負兒石)을 중심으로 반경20m 안에 형성된 용아기종은 신비롭고 특이한 분위기를 자아내 천연기념물 제439호로 지정됐다. 일제강점기 때 한 일본인이 사실적인 조형미에 반해 강제로 반출하려 했으나 무산됐다. 

주민들이 ‘유원지’라고 부르는 초승달 연못은 사방이 바다에서 만난 섬 속 습지라 더욱 귀하고 색다르다. 지난 1959년 사라호 태풍 때 동반한 해일 피해를 막기 위해 주민들이 바다를 막아 제방을 쌓아 생겨난 인공호수다. 바다물이 지하로 스며들어 해수와 담수가 섞인 염습지로서 2003년 방죽 주변에 나무데크와 쉼터, 전망대와 산책로(964m)를 만들어 탐방객들에게 생태휴식공간으로 활용된다.    

이제 마을로 들어선다. 섬을 밝히는 발전소를 지나면 한림초등학교 비양분교다. 학교 정문은 정랑으로, 운동장은 화산쇄설물인 송이를 깔아 새삼 이곳도 제주의 한 부분임을 확실히 느끼면서 보건소를 지나 선착장으로 회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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