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봄, 제주도 일주 여행을 다녀왔다. 제주에 머문 16박 17일의 시간은 나에게 영감이 되어 돌아왔다. 
여행을 자주 가지 않는다. 그런데도 여행을 좋아한다. 낯선 곳으로 가서 낯선 사람들을 살펴보고 낯선 기류 속에서 낯선 사람이 되어 보기를 즐긴다. 여행은 낯익은 것이 아니라 낯선 것을 위한 일이다. 예술적 영감은 물론이거니와 삶의 영감 역시 낯선 것한테서 온다. 여행지에서는 누구나 한 번쯤 이런 생각에 빠진다. 

‘여기 와 살까…….’ 
꼭 필요한 게 아니라면 나는 여행지에서 글을 쓰지 않는다. 여행까지 와서 글이라니, 반칙이다. 여행은 노동으로부터 멀어지는 일이 아닌가. 여행지에서 하는 노동은 대개 쓸모없는 것이어야 한다. 여행까지 와서 쓸모 있는 인간이고자 하는 거, 역시 반칙이다. 여행은 잠시라도 마음 놓고 세상 쓸모없는 인간이 되어 보는 일이 아닌가. 여행지에서 반칙하는 이들 많다. 

모모 씨는 여행까지 와서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생활을 하고자 했고, 무무 씨는 여행지에서 놀고먹는 대신 걷고 또 걷고자 했다. 그런 모모, 무무 씨와 여행 도중에 모름지기 여행이란 ‘낮저밤이’ ‘식도락여행’이여야 하지 않느냐 항변하였다가 나는 오랜 침묵의 시간을 견뎌야 했다. 그뿐인가. 나도 종종 반칙하려 했다. 여행지에서 쓰는 글은 무언가 다를 것이라는 허망한 기대에 휩싸여 안 그래도 무거운 가방에 노트북을 꾸역꾸역 챙겨 갔다가 한 번도 열어보지 않고 돌아왔다.

그러나 여행 중에도 규칙적인 생활을 하려는 이와 여행지를 구석구석 돌아다녀야 보람차다고 생각하는 이와 매일 여행의 기록을 남겨두어야 직성이 풀리는 자가 없었더라면 나는 지금쯤 이런 글을 쓸 수 없었을 것이다. 내 편에서는 반칙이나 그 사람들 편에는 원칙인 것들이 혹은 내 편에서는 원칙이나 그 사람들 편에서는 반칙인 것들이 또한 예술적 영감이 되고 삶의 영감이 된다.  

작년 봄에는 짝꿍과 함께 제주도 일주 여행을 다녀왔다. 16박 17일.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났고 많이 걸었고 적게 먹었다. 꼭 필요한 일이라서 글 몇 편을 써 송고하기도 했다. 여행지에서 돌아온 이후에도 습관적으로 빨리 잠자리에 들었고 그 때문에 삶의 질이 한결 나아졌으며 그 어느 때보다도 종아리와 허벅지가 튼튼해졌고 뱃살이 다소간 평화로워졌다. ‘여행의 책’이라 이름 붙인 글은 다음과 같이 시작하였다. 

‘제주도 일주 여행을 다녀왔다. 떠나기 전 책 한 권을 챙겼다. 여행할 때마다 어김없는 일이다. 여행지에 가져갈 책을 고르는 일은 여행자라는 마음을 가볍게 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다. 경험에 따르면 그곳이 어디든 일단 책을 펼치고 앉으면 여행자는 한눈판다. 여행은 한눈파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가볍게.’

제주도에 관해 이야기했지만, 만약 여행이 한눈파는 마음으로 나 자신을 낯설게 만들기라면, 사실 예술에, 삶에 영감을 주는 여행지란 지금, 여기를 포함하는 모든 곳이다. 무슨 말인가 하니, 지금 이 순간에도 이곳에서 사건이 벌어지고 있다는 말이다. 여행은 극적이든 사실적이든 사건이 필요하다. 

동네의 한 카페에서도 나는 생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을 살펴보고 때때로 그들과 눈이 마주쳐서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 시시각각 변화하는 창밖의 풍경을 낯설게 보면서 이국에 있는 친구에게 텔레그램으로 소식을 묻는다. 그곳은 어떤가요? 그곳으로 가려면 언제가 좋은가요? 그곳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사건에 관하여 떠올린다. 그 친구와 나는 언젠가 함께한 여행에서 가장 가까운 원칙을 공유한 사이였으며, 그러므로 함께 반칙하고자 하는 것 역시 많은 사이였다. 

때때로 나는 작가에게 영감을 주는 건 공간이 아니라 시간이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내가 여행을 좋아하는 것도 낯선 공간 때문이라기보다는 낯선 시간 때문이다. 굳이 이국으로 떠나가지 않아도 제주의 밤은 얼마나 저 먼 나라의 시간 같았는지... 여행은 공간을 이동해가는 일이 아니라 시간을 이동하는 일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라고 나는 생각한다. 

지금 다시 제주에 간다고 해서‘여행의 책’이 똑같이 쓰일 리 없다. 사랑도 그렇지만 여행 역시 타이밍이다. 여행은 삶 안에 있고 삶은 시간의 산물. 여행에서 돌아온 이들의 글이 그토록 그곳에서의 경험, 삶에 빠져 있는 건 공간에 대한 매혹이 아니라 공간속에 있던 시간에의 매혹이다. 여행은 삶으로부터 더 멀리, 삶으로 더 가까이 가려는 일이다. 

그건 지금, 여기, 모든 시간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일. 가령, 나는 지금 카페로 들어온 두 연인을 보고 있다. 생전 처음 보는 이들이다. 두 사람은 로즈데이를 맞아 장미꽃을 주고받은 것으로 보이며 곧 하루에 딱 한 번뿐인 카페 이벤트에 당첨된다. 오늘 둘의 연애는 그러니까 한편 기적적인 것이다. 그런 걸 목격하는 나의 일상은 지금까지와는 또 얼마나 다른가. 당신이 읽고 있는 이 글은 그러니까 기행문이다.

글. 김현(시인) 2009년 『작가세계』 등단. 시집 『글로리홀』
사진. 한국관광공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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